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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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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0년 일제가 한국 식민 통치를 위해 설치한 자문 기관이다. 한국인 유력자들을 회유하여 식민 통치에 협력하게 하고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했고, 부의장, 고문, 참의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으며, 친일파 양성 기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에 중추원 관계자가 포함되었고,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다수의 중추원 관련자가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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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중추원
지도
기본 정보
명칭중추원
한자中樞院
설치1910년 10월 1일
폐지1945년 8월 15일
소속조선총독부
위치경성부
구성의장
부의장
고문
참의
서기관
역할조선총독 자문 기관
칙령 제정 및 개정 자문
법률 및 제도 조사 및 연구
특징실질적 권한 미약
조선인 친일파 참여
역사
배경한일 병합 조약 체결
기존 대한제국 중추원 해산
조선총독부 자문 기관 필요
설치1910년 10월 1일
변화1910년 ~ 1919년: 의결 기능 부재, 자문 기관 역할
1919년 ~ 1945년: 자문 기능 강화, 일부 조선인 참여 확대
폐지1945년 8월 15일
조직 및 구성
의장조선총독
부의장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고문조선인 친일파
일본인 관료
참의조선인 친일파
일본인 관료
서기관일본인 관료
역할
자문조선총독 정책 자문
칙령 제정 및 개정 자문
법률 및 제도 조사 및 연구
의결권의결권 없음, 자문 기관 역할 한정
기타친일 정책 홍보 및 선전 활동
활동
주요 활동친일 법률 및 제도 제정 협력
조선총독부 정책 옹호
친일 단체 지원
비판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 협력
조선인 친일파 양산
실질적 영향력 미미
평가
긍정적 평가없음
부정적 평가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 기관
친일파 양성
조선 민족 자율성 침해
기타
관련 인물이완용
박영효
윤덕영
김성수
관련 사건일제강점기 친일 행위

2. 설치 배경 및 목적

1910년 9월 30일 공포되고 10월 1일 시행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칙령 제355호)에 의하여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설치되었다.[3] 1910년 12월 12일 「중추원의사규칙」, 1918년 1월 19일 「중추원사무분장규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일제는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형식적인 지방자치제를 시행하였고, 중추원은 이러한 지방행정기구에 대응하는 자문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각급 행정기관에는 중추원, 참여관, 도회, 부회, 읍회, 면협의회 등 자문 기관 또는 의결 기관이 구성되었다.

중추원의 실질적인 목적은 한국인 유력자들을 회유하여 식민 통치에 협력하게 만들고,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3. 주요 구성 및 역할

중추원은 의장 1명,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 서기관장 1명, 서기관 및 통역관 약간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의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한국인이 맡을 수 있는 최고위직은 부의장이었다.[3] 1921년 관제 개정으로 찬의와 부찬의는 참의로 통합되었다.[4]

중추원은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1919년 3.1 운동 이전까지 중추원은 단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3]

초대 부의장은 김윤식이, 고문에는 이완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이지용,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이근상, 이용직, 조희연 등이 임명되었다.[3]

4. 주요 인사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에 의해 설치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의장 1명, 부의장 1명, 고문 15명, 찬의 20명, 부찬의 35명, 그리고 서기관장 1명, 서기관, 통역관 약간 명으로 구성되었다. 의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고, 한국인이 맡을 수 있는 최고위직은 부의장이었다.

초대 부의장은 김윤식이었고, 고문에는 이완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이지용,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이근상, 이용직, 조희연 등이 임명되었다.[3] 1921년 찬의와 부찬의는 참의로 통합되었으며, 1939년에는 박상준이 참의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전까지 중추원은 단 한 차례도 소집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를 역임한 조선인은 346명에 달한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중추원 관련자들이 포함되었다.

4. 1. 역대 의장 (전원 일본인)

4. 2. 역대 부의장 (한국인)


4. 3. 역대 서기관장(일본인)


  • 국분 쇼타로(国分象太郎)
  • 고마쓰 미도리(小松緑): ? ~ 1916년 10월 30일
  • 아키야마 마사유스케(秋山雅之介): 1916년 11월 4일 ~ ? (서기 담당)
  • 세키야 사다자부로(関屋貞三郎): 1917년 10월 8일[1] ~ 1919년 8월 20일[2]
  • 오츠카 조자부로(大塚常三郎): 1919년 8월 20일[2] ~ ? (겸임)
  • 마츠나가 무네키치(松永武吉): 1919년 9월 26일 ~ ?
  • 오다 칸지로(小田幹治郎): 1922년 9월 30일 ~ 1923년 3월 29일
  • 나가노 미키(長野幹): (학무국장 겸임)
  • 이쿠다 세이자부로(生田清三郎): (내무국장 겸임)
  • 이마무라 타케시(今村武志): (내무국장 겸임)
  • 우시지마 쇼조(牛島省三): (내무국장 겸임)
  • 오타케 주로(大竹十郎): (내무국장 겸임)
  • 카미타키 모토(上滝基): (내무국장 겸임)
  • 스즈카와 토시오(鈴川寿男): (사정국장 겸임)
  • 신가이 하지메(新貝肇): (사정국장 겸임)

4. 4. 기타 주요 인물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단 한 번의 소집 명령도 없었던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는 이완용(훈1등 백작), 박제순(훈1등 자작), 고영희(훈1등 자작), 조중응(훈1등 자작), 이지용(훈1등 백작), 권중현(훈1등 자작), 이하영(훈1등 자작), 이근택(훈1등 자작), 송병준(훈1등 자작), 임선준(훈1등 자작), 이재곤(훈1등 자작), 이근상(훈2등 남작), 이용직(자작, 이후 3·1운동 가담으로 작위 박탈), 조희연(남작, 사후에 반납)이 임명되었다.[3] 1939년에는 박상준이 참의에 임명되었다.

5.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한 친일파 양성의 온상이었다. 중추원 간부를 역임한 조선인은 346명에 달한다.[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다수의 중추원 관련자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337명,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중추원 분야 244명, 다른 분야 89명(총 333명)이 수록되어 있다.

6. 해방 이후

1945년 9월 21일,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에 의해 중추원은 폐지되었다. 중추원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회의사당, 시민회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6년 철거되었다. 중추원 관련자들은 해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역사적, 사회적 심판을 받았다.[3]

7. 평가 및 비판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친일파를 양성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형식적인 자문 기구로서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한국인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기만적인 제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 중추원 활동은 한국 사회에 친일 잔재를 남기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중추원 관련자들이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337명의 중추원 관련자가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중추원 분야 친일반민족행위자 244명, 다른 분야에서 조사한 중추원 관련자 89명(총 333명)이 수록되어 있다.

참조

[1] 간행물 官報 1917-10-09
[2] 간행물 官報 1919-08-21
[3]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4] 웹인용 중추원관제_국가기록원 http://contents.arch[...] 201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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